2021. 12. 23., 서울 중구 수표로 42-21.

우물쭈물이 다소 긴 편입니다

HAPPY BETA-DAY

생일이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12월 23일이 생일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크리스마스와 가깝다는 이유로 항상 선물을 합쳐서 하나만 받았던게 어린 마음에 용심이 났던 탓이었을까요.

스물둘 생일은 을지로에서 보냈었어요. 친구가 레터링 케이크를 준비해줬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예약이 안돼서 수유까지 가서 픽업해왔다고 하더라고요. 안그래도 처음 받아보는 거였는데 너무 감동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저 때 받은 케이크에 적힌 “HAPPY BETA-DAY”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이후로 제 생일에는 베타데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어요. 꼭 나만의 생일이 생긴 것 같잖아요? 헤헷.

그게 마음에 들었던 베타놈은 베타데이를 생일 주간으로 확장시키기에 이릅니다. 12월 23일 언저리부터 12월 31일까지를 베타의 날로 지정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오천만 대한민국 사람들이 약속하고 기념하는 날은 아니지만 하루 빨리 법정공휴일로 지정되면 좋겠네요.

그렇게”HAPPY BETA-DAY(그런데 이제 8일인)“을 지정한지 2년째… 꽤나 멋지고 음침했던(?) 2023년의 BETA-DAY에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께 이 글을 올립니다.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2023. 12. 15., 경북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국제관.

그런데 이 정신나간 학교는 가을학기 종강이 항상 내 생일 전후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뜻하는게 뭐냐면요…

크리스마스에 시험 공부를 해야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에 클레임을 가야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에 기숙사 이사를 해야할 수도 있다!

(new!) 크리스마스에 기말고사 채점을 해야할 수도 있다!

생일이라고 쓰면 공감성 경악을 외치지 못하실까봐 크리스마스로 나타내봤습니다. 한결 끔찍하죠? 낄낄… 학부생 대학원생 교수 모두의 인권과 행복을 위해 종강을 1주 당겨야한다고 간곡히 외치는 바 입니다.

뭐 아무튼. 올해는 착한 일을 많이 했는지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서관에 갇혀서 밤샘 공부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착한 어린이에게 월요일 자정까지 과제연구 포스터를 제출하고 화요일에 이종병렬컴퓨팅 프로젝트 최종 발표를 한 뒤 자정까지 고급프로그래밍 팀플 코드를 제출하고 목요일에 고급프로그래밍 팀플 최종 발표하고 금요일에 과제연구 포스터 발표를 하고 그 직후에 고급프로그래밍 기말고사를 보고 과제연구 최종 보고서를 자정까지 제출하는 선물을 주셨어요. 정말 발등이 따뜻해졌답니다.

2023. 12. 21., 경북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학생회관.

구성 아직 더 남았어요. 교양 최종 보고서도 남았고 이종병렬컴퓨팅 기말고사도 남았어요. 21일의 기말고사를 끝으로 종강을 한다는 점이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점이랄까요. — 사실 28일까지 프로젝트 최종 보고서를 제출해야하지만 그건 짱똑똑하고멋진학부생 베타가 하겠죠.

여느 때와 같이 수업 안 듣고 팽팽 놀다가 시험 전 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밤을 새지는 않았다는 거? 벼락치기하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지만 요령이 생겼는지 밤을 새지는 않아도 되더라고요. 뭐… 사실 체력 문제가 더 클 겁니다. 어쨌든. 1페이지의 치트시트를 쓸 수 있는 시험이었어서, 당일에 일어나서 다시 정리하면서 치트시트를 만들었습니다. 근데 치트시트 볼 겨를도 없게 문제를 내실 거면 그냥 쓸 수 없다고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꾸러기 자세가 어울린대요

2023. 12. 21., 경북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기숙사.

학부 마지막 기말고사를 끝내고 뭘 할까 고민을 하다가 안경을 맞췄습니다. 별 이유는 없었어요. 대전에서 만난 친구가 안경 맞추라고 했었는데 12월 초에 이소라 콘서트를 갔다가 꽤 앞자리였는데도 얼굴이 잘 안보여서 그 때 말 들을걸 하고 후회한게 이유랄까요. 이런 사건이 아니더라도 시력이 나빠지고 있다는건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2022년 건강검진에서 시력이 2.0 / 0.3 정도였는데 2023년 건강검진에서는 0.7 / 0.1이 되었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안 좋아졌어요. 캠퍼스에 있는 안경원에서 시력을 다시 측정하고 안경을 맞췄습니다. 안경테만 한 40분 골랐어요. 손님에게 선택적으로 무관심한 안경원이 역시 최고인거 같습니다.

2023. 12. 22., 경북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기숙사.

안경도 맞췄겠다 이젠 방에 들어가서 다리 쭉 뻗고 누워서 휴식은 무슨 3분만에 다시 일어나서 방을 옮길 준비를 했습니다. 학부생 기숙사에 어딜 감히 대학원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20시에 짐을 싸기 시작했고 6시간 동안 짐을 싸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7호 박스 5개와 이것저것들이 결과물로 나왔습니다. 옮기는 건 금방 하니까 자고 일어나서 마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습니다.

축하는 잠시 아껴두고

스물넷 생일에 대한 이야기는 한 토시도 넣어두지 않았으면서 생일을 기념하는 글이라니 낯짝 한번 두껍습니다. 근데 뭐 낯짝이 두꺼운 건 사실이라. 즐겁고 행복한 단면만을 비추고 싶지는 않아서 욕심을 내다 보니 본론은 들어가지도 못했네요. 좋은 길이의 글을 쓴다는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채 꺼내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니까요.

그런데 저라는 사람이 원래 좀 그렇습니다. 우물쭈물이 다소 긴 편입니다.


권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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